웹사이트 상위노출 ‘고영향 AI’ 규정 최소화…느슨한 규제 우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황준영 작성일25-09-17 23:17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웹사이트 상위노출 정부가 공개한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의 하위법령을 두고 AI 산업 진흥에만 초점을 맞춰 규제를 지나치게 풀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인간의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고영향 AI’의 범주를 지나치게 좁게 규정한 데다 ‘과태료 부과’ 장기 유예까지 예고해 처벌 없는 법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내년 1월 시행되는 AI 기본법의 시행령과 고시 2종, 가이드라인 5종을 17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공개했다. 관련 하위법령 초안이 모두 공개된 것은 지난해 12월 AI 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약 9개월 만이다.
그간 업계에선 ‘고영향 AI’의 규정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사업자에게 안전성·신뢰성 확보 책무가 부여되고 최대 3000만원의 과태료 부과 조항도 있기 때문이다. AI 기본법은 ‘고영향 AI’를 에너지, 먹는 물, 보건의료 등 10개 영역에서 활용되는 AI 가운데 인간의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위험 초래 우려가 있는 경우 등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그 밖의 영역은 시행령으로 정하도록 했다. ‘중대한 영향’ 표현이 모호하고 법에서 정한 영역이 제한적이라 하위법령이 추가 기준을 제시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날 공개된 시행령·가이드라인은 고영향 AI 범주를 최소한으로 규정했다. 시행령에선 고영향 AI 범주가 추가·보완되지 않았고 가이드라인은 법에 이미 나열된 영역의 구체적 적용 사례를 제시한 정도였다. 이를테면 운전자의 개입 없이 AI 스스로 판단해 도로를 주행하는 ‘레벨4’ 이상 자율주행 시스템은 고영향 AI에 해당한다.
한국보다 앞서 AI 법을 제정한 유럽연합(EU)은 관련 규제가 촘촘하다. 개인 또는 집단의 행동이나 성향을 점수화해 차별에 활용(소셜 스코어링)하는 AI는 아예 ‘수용 불가’로 규정해 금지한다. 얼굴 표정, 음성, 생체 신호 등을 통해 인간 감정 상태를 판별하는 AI는 ‘고위험 AI’로 분류한다. 금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관리 시스템과 인간 감독체계 구축, 기본권 영향 평가, 이용자 안내 등 다양한 의무가 부과된다. 한국의 AI 기본법과 시행령으로는 EU에서 금지하거나 강력 제재하는 AI를 규제하기 힘들 가능성이 있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는 제품 안전, 사법, 선거에 영향을 주거나 인간의 취약점을 이용하는 AI에 대해선 EU처럼 금지까진 못하더라도 고영향 AI로 규정해 최소한의 규제를 해야 하는데 하위법령에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AI 기본법의 ‘과태료 부과’ 유예를 거듭 예고하고 있는 것도 비판 대상이다. AI 기본법에 따르면 고영향 AI 사업자는 위험관리 방안·이용자보호 방안 수립 및 사람 관리·감독, 관련 문서의 작성과 보관 등의 의무를 진다. 이를 어길 경우 사실조사를 거쳐 시정명령을 받을 수 있고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최대 3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받게 된다.
이날 간담회에서 김경만 과기정통부 인공지능기반정책관은 유예기간 설정에 무게를 두면서 그 기간에 대해선 기업, 시민사회와 논의해 설정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12일 배경훈 과기정통부 장관은 최소 1년 이상의 유예기간을 언급했다. 이에 대해 오 대표는 법에 따라 책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가만히 두겠다는 것으로, 처벌규정 없는 법이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느슨한 규제’를 천명한 만큼 업계에선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AI 스타트업 관계자는 투명성(AI 표시) 의무와 관련한 일부 면제조항과 과태료 계도기간 설정 등이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고위험 AI 안전장치를 강력하게 요구해온 시민단체 등의 반발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재흥 시민기술네트워크 상임이사는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에 산업계뿐 아니라 시민사회 인사들도 다수 참여하게 된 만큼 우려 사항에 대해 숙의가 이뤄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유난히 늦은 듯해도 계절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가장 먼저 가을의 기미를 드러낸 건 나무들이다. 뜨거운 햇살 받으며 지상의 양식을 짓던 나뭇잎에는 붉고 노란 기운이 올라앉았다. 또 하나의 계절에 담긴 사람살이의 자취를 품고 나무는 세월의 지붕이 된다.
서울 광진구 화양동 주민센터 앞 작은 공원에는 700년 세월의 자취를 지켜온 느티나무가 있다. 나무 높이 28m, 가슴높이 줄기 둘레 7.5m에 이르는 이 느티나무는 서울의 느티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규모도 가장 큰 나무다. 게다가 기품을 잃지 않은 오래된 나무의 생김새는 감동을 일으킨다.
나무가 서 있는 화양동은 조선 태조가 왕실 목장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 자리에서 넓은 들판과 강, 아차산과 용마산이 어우러진 풍광을 완상하겠다는 목적으로 정자를 세운 건 세종 14년(1432)이었다. 그때 세종은 판중추부사 최윤덕에게 어명을 내려 ‘화양정(華陽亭)’이라는 정자를 짓게 했다. 지금의 화양동이라는 지명은 그 정자 이름에서 비롯됐다.
조선 초기의 역사를 담은 화양정은 1911년 여름에 벼락을 맞고 무너졌는데, 그 곁의 느티나무가 홀로 남아 옛 사람살이의 자취를 지켜왔다. 정자가 세워질 무렵 이미 100년이 넘은 나무였으니, 조선 왕실의 역사와 나라의 흥망을 함께 지켜본 산 역사인 셈이다.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만큼 그의 몸에 남은 상처도 적지 않다. 굵은 가지 하나는 오래전에 부러져 외과 수술을 통해 충전재로 메운 흔적은 또렷이 남았다. 그럼에도 노거수의 기품은 전혀 잃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처럼 장대한 느티나무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오랜 세월을 건너 지금 우리 곁에 서 있는 나무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와 호흡하며 가뭇없이 사라진 조선 왕실의 자취를 묵묵히 채워온 존재다.
더불어 나이 들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생명체는 단언컨대 나무밖에 없다는 사실을, 700년 느티나무의 경이로운 자태를 바라보며 새삼 되새기게 된다.
사람들은 강요된 감동에 거부감…디즈니의 잇따른 실패는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의 반작용‘케데헌’은 우리 고유의 가치를 탁월한 ‘감정의 빌드업’으로 풀어내…‘왜 한국서 만들지 못할까’는 본질을 비켜난 질문인문학도 보편성을 추구하는 기초학문…문화산업이란 ‘공구리’ 속에 인문학이란 피맛골을 뭉개지 않기를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를 처음 본 것은 공개한 지 5일쯤 지났을 때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이었다. 50대 중년 남자가 이어폰을 끼고 태블릿으로 여성 아이돌이 주인공인 ‘만화영화’를 보며 키득거리는 모습을, 지나가던 승객들이 좀 딱하다는 표정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믿거나 말거나겠지만 나는 그때 <케데헌>이 한류의 역사를 바꿀 작품임을 직감했고 이후 열렬한 <케데헌>의 전도사가 되었다.
공개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케데헌>은 한류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중문화의 역사도 새로 쓰고 있다. <케데헌>을 유통하고 있는 넷플릭스에서는 시청시간에서 이미 영화 부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전체 콘텐츠 중 1위인 <오징어 게임>도 넘어섰다. 번외 행사로 진행한 8월 말 주말 극장가 싱얼롱 상영에서는 다른 인기작들의 절반에 해당하는 상영관으로도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영화 수록곡인 ‘골든’은 전 세계 주요 음원 차트를 석권했고 빌보드 ‘핫100’ 10위 안에 수록곡 4곡을 진입시키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빌보드 ‘핫100’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라고 한다.
<케데헌>은 왜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내가 찾은 힌트는 낯섦과 익숙함의 조화이다. <케데헌> 전체를 뒤덮고 있는 깨알 같은 한국적인 요소들은 외국인들에게 낯설다. 단순한 선악의 대립구도, 자기애와 자기수용, 상처의 치유, 신뢰와 우정 등은 세상 사람 모두에게 익숙하다. 익숙함은 곧 인간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보편적인 정서이다. 그러니까 낯섦과 익숙함의 조화는 결국 한국적 특수성 속에서 인간의 보편성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는 말로 풀어 쓸 수 있다. 이 공식은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이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역적 특수성이 낯설수록 익숙한 보편성의 공감도가 더 높아진다는 점이다. 익숙한 상황에서 접하는 보편성은 새로울 것도 없고 따라서 보편성의 ‘확장’도 없다. 그 결과 감동도 없다. 문학의 대가들은 자기 주변의 매우 구체적이고 독특한 환경 속에서 세상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 보편의 정서를 자기만의 언어로 포착해낸다. 한강 작가 덕분에 전 세계 사람들은 이제 5·18민주화운동이나 제주 4·3이라는,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풍경 속에서 인간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역사적 트라우마, 거기 노출된 인간의 연약함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자연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물리학에서도 비슷하다. 근대 과학의 틀을 확립한 뉴턴은 보편적인 중력법칙(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해 지상의 물체 운동과 밤하늘 천체의 운동을 모두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자연의 보편법칙을 찾았다고 해서 거기 만족하는 법이 없다. 태양계 너머 은하 이상의 척도에서 또는 아주 미시적인 척도에서도 뉴턴의 중력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다. 익숙한 자연의 법칙들이 과연 어느 정도 극한 상황에까지 적용되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은 과학자들에게 무척 중요하다. 만약 그 한계가 정해진다면 그 너머에는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는 정황이니까 여태 알려지지 않은 자연의 비밀을 캐낼 수도 있다.
같은 원리를 적용해보면 <케데헌>에서 한국 문화의 과거와 현재 세부사항들을 섬세하게 구현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건 단지 한류나 K라고 하면 무조건 좋아하는 일부 외국인들의 유인책이 아니다. 만약 그게 한류에 익숙한 외국인들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만 작동했다면 한류와 한국을 모르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케데헌>을 보고 열광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한국적 세부사항이 인간의 보편적 정서가 확장돼서 드러나는 무대로 작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보편성이 지역적 시대적 특수성을 통해 성공적으로 발현되면 낯선 것들이 의미 없는 남의 것들이 아니라 그 나름의 ‘사연’을 덧입게 되고 새로운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 김밥과 컵라면, 낙산공원과 남산서울타워는 <케데헌> 이전과 이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사연은 원래의 사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더피와 서씨는 호작도라는 원래의 ‘근본이 있는’ 사연 덕분에 더 풍성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사연과 서사의 중요성은 떡볶이의 사례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오래전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 정부가 나서서 많은 돈을 들여 떡볶이를 선봉으로 대대적인 홍보에 나선 적이 있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떡의 물컹하고 질긴 질감과 매운 소스는 여전히 외국인들에게 큰 장벽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떡볶이임에도 BTS가 즐겨 먹는 간식으로 알려진 뒤로는 외국인들이 이상한 식감과 매운맛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떡볶이를 즐겼다. 차이는 단 하나,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즐긴다는 사연이 생겼기 때문이다. 떡볶이라는 음식의 물리적 화학적 특성을 넘어서는 서사의 힘이 이렇게나 위대하다.
반대로 한국적 세부사항이 한국 사람도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구현되지 않았다면 이는 지역적 특수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보편성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제작팀이 추구하는 보편성을 관객들에게 ‘강요’하는 느낌을 주게 된다. 사람들은 강요된 감동을 싫어한다. <케데헌>의 대성공과 크게 대조를 이루는 최근 디즈니의 잇따른 실패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C)’의 반작용을 원인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이름부터가 눈처럼 하얀 백설공주(Snow White)를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다른 피부색으로 내세우면 시각적으로 직접 뭔가를 강요받는 느낌이 들 법하다.
<케데헌>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한국드라마적 기법을 차용한 것도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한국드라마의 강점 중 하나는 이른바 ‘감정의 빌드업’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한 드라마 안에서도 여러 장르를 오가며 희로애락의 변주가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그게 너무 섬세하고 자연스럽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미묘하게 변화하는지 그것이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매우 세밀한 단계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조차 우리 드라마를 보고 키스나 격한 애정표현 없이 단지 손만 잡는 장면만으로도 설렘을 느낀다. <케데헌>에서도 마치 한국드라마를 보는 듯한 장면과 감정전개가 드물지 않게 나온다. 일화에 따르면 루미와 진우의 키스신을 일부러 뺐다는데, 아마도 같은 맥락에서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감정이든, 메시지든 투박하고 직설적인 강요는 반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차별금지라는 얘기를 주인공의 피부색을 바꾸는 ‘손쉬운’ 방법으로 관객들을 향해 직접 내던지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스토리 안에 녹아들지 않고 작품 외적으로 윽박지르는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반면 <케데헌>에서는 약점과 상처, 불완전함, 죄의식 등을 자기애와 자기수용으로 승화시켜 (이는 원래 K팝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스토리 내부의 인물들 속에서 밀도 있게 그려낸다. 아마도 많은 유색인종의 아이들과 부모들은 <케데헌>을 보고 엄청난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어른들도 <케데헌>을 보고 치유의 경험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모든 삽입곡이 기가 막히게 잘 녹여냈다. 노래 자체의 완성도도 높지만 노래가 그냥 장식품 정도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스토리를 끌고 가는 중요한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래서 노래만 듣더라도 한 편의 서사가 펼쳐지며, 그 과정에서 지금 현실에서 상처받고 있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중첩된다. 그 결과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받고 치유되는 느낌을 얻는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케데헌>은 한인 디아스포라의 한(恨)을 매우 세련되게 풀어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을 만든 매기 강 감독은 어릴 때 주변의 시선 때문에 K팝 포스터나 굿즈를 숨겨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루미의 목소리 역을 맡았던 아덴 조는 텍사스 출신으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말할 때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서 꿈을 이뤄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적잖은 교포들은 김밥 장면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어릴 때 김밥을 학교 도시락으로 싸 가지 못했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근의 한류와 그리고 지금의 <케데헌> 덕분에 이제는 당당하게 no more hiding 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우리는 한국에서 <케데헌>을 만들지 못하느냐는 질문이 <케데헌> 현상의 본질을 비켜나간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낯섦과 익숙함의 조화, 한국적 특수성 속에서의 인간 보편성의 추구라는 관점에서 <케데헌>의 대성공을 바라보면, 우리 고유의 한국적 요소들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나는 종로에 나갈 때마다 ‘공구리’ 속에 사라진 피맛골이 너무 그립다. 원형을 유지하는 쪽으로 일을 진행했더라면 피맛골은 지금 북촌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피맛골은 이름 자체가 역사적인 사연을 가진 곳이다. 공간이 사라지면 사연과 서사도 함께 사라진다. 현대화나 개발의 이름 속에 사라진 것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이런 인식을 조금 확장하다 보면 나 같은 물리학자도 한국학 또는 인문학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얼마나 중요한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인문학도 기초과학과 마찬가지로 가장 근본적인 보편성(인간을 향한)을 추구하는 기초학문이 아닐까 싶다. 돈이 되지 않는다고 홀대받는 현실은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너무 뻔할 것 같다. 문화산업 300조원 시대도 좋고, 한국산 <케데헌>도 좋지만 그걸 오랫동안 지속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결국 기초학문일 수밖에 없다. 요즘 날마다 방문객 수를 경신하고 있다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장 명확한 증거가 아닐까. 문화산업이라는 ‘공구리’ 속에 발기부전치료제구매 인문학이라는 피맛골이 다시 뭉개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내년 1월 시행되는 AI 기본법의 시행령과 고시 2종, 가이드라인 5종을 17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공개했다. 관련 하위법령 초안이 모두 공개된 것은 지난해 12월 AI 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약 9개월 만이다.
그간 업계에선 ‘고영향 AI’의 규정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사업자에게 안전성·신뢰성 확보 책무가 부여되고 최대 3000만원의 과태료 부과 조항도 있기 때문이다. AI 기본법은 ‘고영향 AI’를 에너지, 먹는 물, 보건의료 등 10개 영역에서 활용되는 AI 가운데 인간의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위험 초래 우려가 있는 경우 등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그 밖의 영역은 시행령으로 정하도록 했다. ‘중대한 영향’ 표현이 모호하고 법에서 정한 영역이 제한적이라 하위법령이 추가 기준을 제시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날 공개된 시행령·가이드라인은 고영향 AI 범주를 최소한으로 규정했다. 시행령에선 고영향 AI 범주가 추가·보완되지 않았고 가이드라인은 법에 이미 나열된 영역의 구체적 적용 사례를 제시한 정도였다. 이를테면 운전자의 개입 없이 AI 스스로 판단해 도로를 주행하는 ‘레벨4’ 이상 자율주행 시스템은 고영향 AI에 해당한다.
한국보다 앞서 AI 법을 제정한 유럽연합(EU)은 관련 규제가 촘촘하다. 개인 또는 집단의 행동이나 성향을 점수화해 차별에 활용(소셜 스코어링)하는 AI는 아예 ‘수용 불가’로 규정해 금지한다. 얼굴 표정, 음성, 생체 신호 등을 통해 인간 감정 상태를 판별하는 AI는 ‘고위험 AI’로 분류한다. 금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관리 시스템과 인간 감독체계 구축, 기본권 영향 평가, 이용자 안내 등 다양한 의무가 부과된다. 한국의 AI 기본법과 시행령으로는 EU에서 금지하거나 강력 제재하는 AI를 규제하기 힘들 가능성이 있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는 제품 안전, 사법, 선거에 영향을 주거나 인간의 취약점을 이용하는 AI에 대해선 EU처럼 금지까진 못하더라도 고영향 AI로 규정해 최소한의 규제를 해야 하는데 하위법령에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AI 기본법의 ‘과태료 부과’ 유예를 거듭 예고하고 있는 것도 비판 대상이다. AI 기본법에 따르면 고영향 AI 사업자는 위험관리 방안·이용자보호 방안 수립 및 사람 관리·감독, 관련 문서의 작성과 보관 등의 의무를 진다. 이를 어길 경우 사실조사를 거쳐 시정명령을 받을 수 있고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최대 3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받게 된다.
이날 간담회에서 김경만 과기정통부 인공지능기반정책관은 유예기간 설정에 무게를 두면서 그 기간에 대해선 기업, 시민사회와 논의해 설정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12일 배경훈 과기정통부 장관은 최소 1년 이상의 유예기간을 언급했다. 이에 대해 오 대표는 법에 따라 책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가만히 두겠다는 것으로, 처벌규정 없는 법이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느슨한 규제’를 천명한 만큼 업계에선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AI 스타트업 관계자는 투명성(AI 표시) 의무와 관련한 일부 면제조항과 과태료 계도기간 설정 등이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고위험 AI 안전장치를 강력하게 요구해온 시민단체 등의 반발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재흥 시민기술네트워크 상임이사는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에 산업계뿐 아니라 시민사회 인사들도 다수 참여하게 된 만큼 우려 사항에 대해 숙의가 이뤄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유난히 늦은 듯해도 계절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가장 먼저 가을의 기미를 드러낸 건 나무들이다. 뜨거운 햇살 받으며 지상의 양식을 짓던 나뭇잎에는 붉고 노란 기운이 올라앉았다. 또 하나의 계절에 담긴 사람살이의 자취를 품고 나무는 세월의 지붕이 된다.
서울 광진구 화양동 주민센터 앞 작은 공원에는 700년 세월의 자취를 지켜온 느티나무가 있다. 나무 높이 28m, 가슴높이 줄기 둘레 7.5m에 이르는 이 느티나무는 서울의 느티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규모도 가장 큰 나무다. 게다가 기품을 잃지 않은 오래된 나무의 생김새는 감동을 일으킨다.
나무가 서 있는 화양동은 조선 태조가 왕실 목장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 자리에서 넓은 들판과 강, 아차산과 용마산이 어우러진 풍광을 완상하겠다는 목적으로 정자를 세운 건 세종 14년(1432)이었다. 그때 세종은 판중추부사 최윤덕에게 어명을 내려 ‘화양정(華陽亭)’이라는 정자를 짓게 했다. 지금의 화양동이라는 지명은 그 정자 이름에서 비롯됐다.
조선 초기의 역사를 담은 화양정은 1911년 여름에 벼락을 맞고 무너졌는데, 그 곁의 느티나무가 홀로 남아 옛 사람살이의 자취를 지켜왔다. 정자가 세워질 무렵 이미 100년이 넘은 나무였으니, 조선 왕실의 역사와 나라의 흥망을 함께 지켜본 산 역사인 셈이다.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만큼 그의 몸에 남은 상처도 적지 않다. 굵은 가지 하나는 오래전에 부러져 외과 수술을 통해 충전재로 메운 흔적은 또렷이 남았다. 그럼에도 노거수의 기품은 전혀 잃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처럼 장대한 느티나무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오랜 세월을 건너 지금 우리 곁에 서 있는 나무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와 호흡하며 가뭇없이 사라진 조선 왕실의 자취를 묵묵히 채워온 존재다.
더불어 나이 들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생명체는 단언컨대 나무밖에 없다는 사실을, 700년 느티나무의 경이로운 자태를 바라보며 새삼 되새기게 된다.
사람들은 강요된 감동에 거부감…디즈니의 잇따른 실패는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의 반작용‘케데헌’은 우리 고유의 가치를 탁월한 ‘감정의 빌드업’으로 풀어내…‘왜 한국서 만들지 못할까’는 본질을 비켜난 질문인문학도 보편성을 추구하는 기초학문…문화산업이란 ‘공구리’ 속에 인문학이란 피맛골을 뭉개지 않기를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를 처음 본 것은 공개한 지 5일쯤 지났을 때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이었다. 50대 중년 남자가 이어폰을 끼고 태블릿으로 여성 아이돌이 주인공인 ‘만화영화’를 보며 키득거리는 모습을, 지나가던 승객들이 좀 딱하다는 표정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믿거나 말거나겠지만 나는 그때 <케데헌>이 한류의 역사를 바꿀 작품임을 직감했고 이후 열렬한 <케데헌>의 전도사가 되었다.
공개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케데헌>은 한류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중문화의 역사도 새로 쓰고 있다. <케데헌>을 유통하고 있는 넷플릭스에서는 시청시간에서 이미 영화 부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전체 콘텐츠 중 1위인 <오징어 게임>도 넘어섰다. 번외 행사로 진행한 8월 말 주말 극장가 싱얼롱 상영에서는 다른 인기작들의 절반에 해당하는 상영관으로도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영화 수록곡인 ‘골든’은 전 세계 주요 음원 차트를 석권했고 빌보드 ‘핫100’ 10위 안에 수록곡 4곡을 진입시키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빌보드 ‘핫100’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라고 한다.
<케데헌>은 왜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내가 찾은 힌트는 낯섦과 익숙함의 조화이다. <케데헌> 전체를 뒤덮고 있는 깨알 같은 한국적인 요소들은 외국인들에게 낯설다. 단순한 선악의 대립구도, 자기애와 자기수용, 상처의 치유, 신뢰와 우정 등은 세상 사람 모두에게 익숙하다. 익숙함은 곧 인간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보편적인 정서이다. 그러니까 낯섦과 익숙함의 조화는 결국 한국적 특수성 속에서 인간의 보편성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는 말로 풀어 쓸 수 있다. 이 공식은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이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역적 특수성이 낯설수록 익숙한 보편성의 공감도가 더 높아진다는 점이다. 익숙한 상황에서 접하는 보편성은 새로울 것도 없고 따라서 보편성의 ‘확장’도 없다. 그 결과 감동도 없다. 문학의 대가들은 자기 주변의 매우 구체적이고 독특한 환경 속에서 세상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 보편의 정서를 자기만의 언어로 포착해낸다. 한강 작가 덕분에 전 세계 사람들은 이제 5·18민주화운동이나 제주 4·3이라는,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풍경 속에서 인간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역사적 트라우마, 거기 노출된 인간의 연약함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자연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물리학에서도 비슷하다. 근대 과학의 틀을 확립한 뉴턴은 보편적인 중력법칙(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해 지상의 물체 운동과 밤하늘 천체의 운동을 모두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자연의 보편법칙을 찾았다고 해서 거기 만족하는 법이 없다. 태양계 너머 은하 이상의 척도에서 또는 아주 미시적인 척도에서도 뉴턴의 중력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다. 익숙한 자연의 법칙들이 과연 어느 정도 극한 상황에까지 적용되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은 과학자들에게 무척 중요하다. 만약 그 한계가 정해진다면 그 너머에는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는 정황이니까 여태 알려지지 않은 자연의 비밀을 캐낼 수도 있다.
같은 원리를 적용해보면 <케데헌>에서 한국 문화의 과거와 현재 세부사항들을 섬세하게 구현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건 단지 한류나 K라고 하면 무조건 좋아하는 일부 외국인들의 유인책이 아니다. 만약 그게 한류에 익숙한 외국인들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만 작동했다면 한류와 한국을 모르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케데헌>을 보고 열광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한국적 세부사항이 인간의 보편적 정서가 확장돼서 드러나는 무대로 작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보편성이 지역적 시대적 특수성을 통해 성공적으로 발현되면 낯선 것들이 의미 없는 남의 것들이 아니라 그 나름의 ‘사연’을 덧입게 되고 새로운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 김밥과 컵라면, 낙산공원과 남산서울타워는 <케데헌> 이전과 이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사연은 원래의 사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더피와 서씨는 호작도라는 원래의 ‘근본이 있는’ 사연 덕분에 더 풍성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사연과 서사의 중요성은 떡볶이의 사례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오래전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 정부가 나서서 많은 돈을 들여 떡볶이를 선봉으로 대대적인 홍보에 나선 적이 있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떡의 물컹하고 질긴 질감과 매운 소스는 여전히 외국인들에게 큰 장벽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떡볶이임에도 BTS가 즐겨 먹는 간식으로 알려진 뒤로는 외국인들이 이상한 식감과 매운맛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떡볶이를 즐겼다. 차이는 단 하나,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즐긴다는 사연이 생겼기 때문이다. 떡볶이라는 음식의 물리적 화학적 특성을 넘어서는 서사의 힘이 이렇게나 위대하다.
반대로 한국적 세부사항이 한국 사람도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구현되지 않았다면 이는 지역적 특수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보편성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제작팀이 추구하는 보편성을 관객들에게 ‘강요’하는 느낌을 주게 된다. 사람들은 강요된 감동을 싫어한다. <케데헌>의 대성공과 크게 대조를 이루는 최근 디즈니의 잇따른 실패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C)’의 반작용을 원인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이름부터가 눈처럼 하얀 백설공주(Snow White)를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다른 피부색으로 내세우면 시각적으로 직접 뭔가를 강요받는 느낌이 들 법하다.
<케데헌>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한국드라마적 기법을 차용한 것도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한국드라마의 강점 중 하나는 이른바 ‘감정의 빌드업’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한 드라마 안에서도 여러 장르를 오가며 희로애락의 변주가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그게 너무 섬세하고 자연스럽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미묘하게 변화하는지 그것이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매우 세밀한 단계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조차 우리 드라마를 보고 키스나 격한 애정표현 없이 단지 손만 잡는 장면만으로도 설렘을 느낀다. <케데헌>에서도 마치 한국드라마를 보는 듯한 장면과 감정전개가 드물지 않게 나온다. 일화에 따르면 루미와 진우의 키스신을 일부러 뺐다는데, 아마도 같은 맥락에서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감정이든, 메시지든 투박하고 직설적인 강요는 반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차별금지라는 얘기를 주인공의 피부색을 바꾸는 ‘손쉬운’ 방법으로 관객들을 향해 직접 내던지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스토리 안에 녹아들지 않고 작품 외적으로 윽박지르는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반면 <케데헌>에서는 약점과 상처, 불완전함, 죄의식 등을 자기애와 자기수용으로 승화시켜 (이는 원래 K팝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스토리 내부의 인물들 속에서 밀도 있게 그려낸다. 아마도 많은 유색인종의 아이들과 부모들은 <케데헌>을 보고 엄청난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어른들도 <케데헌>을 보고 치유의 경험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모든 삽입곡이 기가 막히게 잘 녹여냈다. 노래 자체의 완성도도 높지만 노래가 그냥 장식품 정도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스토리를 끌고 가는 중요한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래서 노래만 듣더라도 한 편의 서사가 펼쳐지며, 그 과정에서 지금 현실에서 상처받고 있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중첩된다. 그 결과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받고 치유되는 느낌을 얻는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케데헌>은 한인 디아스포라의 한(恨)을 매우 세련되게 풀어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을 만든 매기 강 감독은 어릴 때 주변의 시선 때문에 K팝 포스터나 굿즈를 숨겨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루미의 목소리 역을 맡았던 아덴 조는 텍사스 출신으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말할 때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서 꿈을 이뤄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적잖은 교포들은 김밥 장면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어릴 때 김밥을 학교 도시락으로 싸 가지 못했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근의 한류와 그리고 지금의 <케데헌> 덕분에 이제는 당당하게 no more hiding 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우리는 한국에서 <케데헌>을 만들지 못하느냐는 질문이 <케데헌> 현상의 본질을 비켜나간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낯섦과 익숙함의 조화, 한국적 특수성 속에서의 인간 보편성의 추구라는 관점에서 <케데헌>의 대성공을 바라보면, 우리 고유의 한국적 요소들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나는 종로에 나갈 때마다 ‘공구리’ 속에 사라진 피맛골이 너무 그립다. 원형을 유지하는 쪽으로 일을 진행했더라면 피맛골은 지금 북촌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피맛골은 이름 자체가 역사적인 사연을 가진 곳이다. 공간이 사라지면 사연과 서사도 함께 사라진다. 현대화나 개발의 이름 속에 사라진 것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이런 인식을 조금 확장하다 보면 나 같은 물리학자도 한국학 또는 인문학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얼마나 중요한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인문학도 기초과학과 마찬가지로 가장 근본적인 보편성(인간을 향한)을 추구하는 기초학문이 아닐까 싶다. 돈이 되지 않는다고 홀대받는 현실은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너무 뻔할 것 같다. 문화산업 300조원 시대도 좋고, 한국산 <케데헌>도 좋지만 그걸 오랫동안 지속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결국 기초학문일 수밖에 없다. 요즘 날마다 방문객 수를 경신하고 있다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장 명확한 증거가 아닐까. 문화산업이라는 ‘공구리’ 속에 발기부전치료제구매 인문학이라는 피맛골이 다시 뭉개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