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기부전치료제구매 [단독] 지난해 산재 피해 이주노동자 9200여명···건설·제조업이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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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준영 작성일25-09-22 23:5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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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부전치료제구매 최근 5년간 산업재해로 다치거나 죽은 이주노동자가 꾸준히 늘어나 지난해 9200여명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건설업과 제조업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1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외국인 노동자 산재 현황’ 자료를 보면, 2020년 7583명이던 산재 이주노동자는 2024년 9219명까지 늘었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4550명이 산재 피해를 당했다. 사고가 아닌 질병으로 인한 산재도 2020년 220명에서 2024년 518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산재로 사망하는 이주노동자는 매년 100명 이상 발생하고 있다. 2020년 118명이던 사망자는 2022년 108명으로 소폭 줄었다가 다시 증가해 2024년 114명을 기록했다. 지난해 사망자 중 사고로 인한 사망은 102명,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12명이었다.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과 건설업에서 대부분의 산재 피해가 발생했다. 지난해 제조업·건설업에서 산재 피해를 입은 이주노동자는 총 7004명으로, 전체 피해 사례의 약 76%를 차지했다. 지난해 전체 사고 사망자 102명 중 73.5%(75명)가 두 업종에서 발생했다. 지난해 운수·창고·통신업과 농업에서는 각각 이주노동자 130명, 268명이 산재 피해를 입었다.
농·어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 산재 피해는 제조업과 건설업에 비해 규모는 적으나, 증가 폭은 크다. 농·어업에서 발생한 이주노동자 산재는 2020년 149명에서 2024년 293명으로 약 96.6% 늘었다.
정부는 이주노동자 산재 피해가 증가하는 데 대해 주목하고 있다. 노동부가 지난 15일 발표한 ‘노동안전 종합대책’에도 중대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의 이주노동자 고용제한 요건을 강화하는 등의 대책이 담겼다. 앞으로 이주노동자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사업주는 3년간 고용이 제한된다. 질병, 부상도 1년간 고용 제한이 적용된다.
강득구 의원은 일하는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안전한 나라가 이재명 정부의 목표인 만큼 이주노동자도 이 목표에서 예외일 수 없다며 이주노동자 산재에 대한 철저한 원인 분석과 다국어 안전교육 의무화, 외국인 전담 안전관리자 배치 등의 해결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성공의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 더 좋은 직장과 더 넓은 집, 적기의 연애·결혼·출산, 취미·건강을 위한 자기계발이 좋은 인생의 기준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잭 핼버스탬의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2011)은 여기에 브레이크를 건다. 그는 실패(failure)라는 부정적 단어를 낙오가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여는 방식으로 다시 쓰자고 제안한다. 실패를 낙오가 아니라 다른 방향키로 보자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성공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균열을 내고 그 틈에서 다른 삶의 감각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론가로서 핼버스탬이 즐겨 쓰는 재료는 의외로 가벼운 것들이다. 애니메이션, 아동영화, B급 코미디. 그는 이런 텍스트에서 ‘정상적’이거나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궤도를 비켜 나가는 이야기를 발견한다. 성공을 향해 직선적으로 올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표 없이 미뤄지고 망설이고 돌아가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장난감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토이 스토리>, 닭들이 농장에서 탈출하는 <치킨 런>, 벌이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꿀벌 대소동> 같은 이야기들은, 단순한 어린이 영화가 아니라 다른 시간, 다른 관계, 다른 질서를 상상하게 만든다. 정답을 향해 질주하는 영웅담이 아니라 삐걱거림을 공유하는 우정의 서사. 핼버스탬은 이런 장르를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고 저급이론(low theory)으로 종합한다. 말 그대로 고급 학문 담론의 반대편에 있는, 일상과 주변부에서 생산되는 사유를 뜻한다.
핼버스탬이 강조하는 ‘실패’는 단순히 좌절이나 무능력이 아니다. 그는 우울, 외로움, 소외, 심지어는 출장용접 퇴행까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열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그림자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꺼낸다. ‘주체적인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페미니즘과 달리, 자기파괴를 욕망하는 여성, 어머니와의 본질적인 유대를 거부하는 여성, 자유를 버리고 수동적이길 원하는 여성들 역시 대항 서사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지·망각·수동성·마조히즘 같은 태도도 포함된다. 핼버스탬은 이러한 태도가 단순한 패배나 회피가 아니라 다른 삶의 계보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시도라고 읽는다.
하지만 이 논의에는 몇가지 한계도 있다. 첫째, 실패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자원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실패는 선택일 수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가난, 인종차별, 장애 같은 조건 때문에 강요된 결과일 수 있다. 둘째, 실패가 퀴어나 여성의 정체성에 고정적으로 붙는 순간, 오히려 원래 실패하는 존재라는 오래된 낙인을 되풀이할 위험이 있다. 즉 실패가 특정한 정체성을 정의하는 진단적인 명칭이 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실패를 지나치게 낭만화할 위험이 있다. 어쩌면 실패는 실패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이들만이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간과한다면 실패는 정치적 저항이 아니라 정서적 위안에 머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여는 문이라는 것이다. 성공이라는 언어가 하나의 길만을 가리킬 때, 실패는 그 길에서 벗어나 옆으로 나가고, 잠시 멈추고, 돌아가며 또 다른 경로를 열어낸다. 따라서 질문도 달라진다. 실패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실패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로. 실패는 낙오의 표지가 아니다. 오히려 제도의 시간을 흔들고, 그와는 다른 리듬으로 살게 하는 기회다. 바로 이 점에서 실패는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언어이자 가능성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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